◆ 성조시대(창세 12 – 50장; 선택– 약속 – 계약)
창세 12, 1-3에서부터 더 이상 인류 전체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그 시조로 등장하는 한 백성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본문에서 하느님의 축복 약속은 우선은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그를 통하여 “땅의 모든 종족들”에게 전달됨으로써 이스라엘과 인류의 미래가 문제시될 뿐이다. 다만 현 문맥 속에서 축복 약속이 원역사의 저주와 대립되고 있다는 점에서 원역사와 성조사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아볼 수 있다. 성조사 즉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요셉 전승은 창세기의 주요부분을 형성한다.
선택 – 임의로 선택, 공로가 있어서 된 일이 아님
① 아브라함과의 계약 – 구세사의 시작
“… 떠나 … 가거라” 아브라함은 분부대로 따른다.
이것이 하느님께 응답하는 올바른 길이요, 하느님의 말씀에 귀의하는 길이다. = 믿는 길
인간은 부름에 응답함으로써 부르는 이의 영원성을 획득한다.
※ 3가지 약속 – 성조사의 핵심주제 (창세 15-17장)
1. 땅, 2. 후손, 3. 만민축복의 근원 – 구세사적으로 중요
아브라함은 믿는 사람의 조상(로마 4,11)
신앙이란 “하느님과 함께 걸어감”(창세 5,24; 6,9; 48,15)
그의 삶에는 하나의 방향, 하나의 의미가 주어졌다.
② 야곱의 시련과 축복
야곱 – 풍운아, 인간적 역경을 뛰어 넘는 하느님 구원의 역사
에사우를 피해다니는 야곱 이야기
=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으나 이방에서 종노릇 해야하는 민족,
부요하게 선물을 받았으나 소유에 대한 보장을 얻지 못한 민족,
축복과 범죄, 보호와 위협 속에 머물러야 하는 민족
하느님마저 자기를 버리신듯한 외로움 엄습
사람이 한생을 살면서 자기를 적대하는 상황과 싸우는 투쟁은 어느 면에서 하느님과의 씨름이기도 하다. – 신앙의 어둔밤
③ 요셉의 모범
하느님께 대한 불굴의 신앙, 정숙, 모욕의 용서, 악을 선으로 갚는 아량 – 그리스도인의 덕목
요셉이야기 – 유다가 요셉을 구해줌 → 하느님의 의도가 드러남(창세 50,20)
1. 기근으로부터 구원
2. 이집트 탈출 사건의 예비
▶ 성조 아브라함(창세 12,1-25,18)
성조들에 대한 이야기
“성조”(聖祖)라는 명칭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과 연결된다. 성경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모든 히브리 민족의 조상이라고 묘사한다.
창세 1-11장은 창조, 낙원, 홍수, 바벨탑 등 원초적인 이야기(원역사)를 짧게 다루고 있다. 어떻게 악이 점차 뻗어나가 인류의 일부가 하느님과 멀어졌으며 그 때문에 하느님께 버림받았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원역사가 무엇을 위해 기록되었는지를 분명히 하면 원래적 메시지 이해할 수 있다.
12장 부터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통과하고, 목자들의 천막 사이를 거닐며, 메마른 지역에서 엄청난 가축떼를 기르는 모습과, 요셉과 11명의 형제가 에집트로 가게 되는 장면에는 한 목자 가정의 소박하고 고요하고 가정적인 분위기를 볼 수 있다. 탈출기에서 이 가정은 하나의 민족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성조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과 열두 부족의 예비 역사라고 불릴 수도 있겠다.
아브라함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인류로부터 한 인간을 선택하시고 이 사람에게 전적인 헌신을 요청하신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선택된 민족이 형성된다. 낙원의 이야기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가 가리워진 것으로 보였던 하늘을 이어주는 끈이 이제 새롭게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구원과 계시에 대한 역사의 기원이다.
아브라함과 함께 계시가 시작되었고, 아브라함과 함께 믿음도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히브리인들과 이교도로서 모든 믿는 이들의 조상이다. 하느님의 친구로서 그는 우리 믿는 이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12,1-25,18)는 몇몇 개별 독립 민담들을 담고 있으며(12,10-20; 22; 23; 24) 이들 민담들은 “이런 일이 있은 뒤에…..”(22,1) 또는 “아브라함은 이제 늙어 ….”(24,1)와 같은 이음 문구들을 통하여 상호 연계되어 있다. 아브라함과 롯에 관한 사화(창세 13장, 18장, 19장)를 통해 모압/암몬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 탄생을 준비하게 된다.
▶ 아브라함의 소명 (창세 12,1-3)
1) 이스라엘 역사의 기원
2) 구원역사의 시작
아브라함은 노아의 10대손. 노아의 맏아들 셈의 후손인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의 우르다(창세 11,28). 아브람의 아버지 테라는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해 길을 떠나가 하란에 이르러 자리잡고 살았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떠난다. 당시 사람들에게 자신이 살던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과 같은 위험한 행위였다.
▶ 이집트로 간 아브람(창세 12,10-20)
▶ 롯의 분가(창세 13장) – 양보의 리더십
아브람은 하란을 떠나게 되고, 조카 롯도 그를 따라 함께 가게된다.
천신만고 끝에 자리를 잡고 이집트를 나올 때 그들은 서로 소유가 너무 많아 부딪칠 정도였다. 삼촌인 아브람이 롯에게 말한다.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13,9)
결국 롯에게 좋은 것을 마음껏 선점하라는 양보였다. 이때 롯은 아름답고 넉넉해 보이는 초아르 평지를 선택하게 된다. 롯이 선택한 그곳은 너무나 성적으로 문란하여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결국 아브람의 양보는 전화위복이 되었고, 롯은 간신히 목숨만 건져 나오게 된다.
▶ 아브라함 계약 -15장(야훼계), 17장(사제계)
3가지 약속 – 성조사의 핵심주제 (창세 15장) →아브라함 계약의 근간
1) 땅 2) 후손 3) 만민축복의 근원 – 구세사적으로 중요
아브라함과 자손(이스라엘)= 하느님 축복의 수혜자
↓
하느님 축복의 전달자
하느님을 닮은 인류→“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12,3)
↓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결정적으로 주어짐
↓
마태 1,1 구원의 약속이 성취됨을 나타냄
● 할례(창세 17장)
아브람의 나이가 아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
주님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세우고,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아브람(높은 가문의 사람) → 아브라함(민족들의 아버지),
사라이(나의 여왕) → 사라(여왕)
100세에 이사악을 얻음 – 25년 동안 신뢰와 믿음으로 …
심적 공허감, 고통을 하느님께서 주신 덤, 은혜로 그릇을 만드셨다.
희망의 메시지가 오는 데는 나이가 없다.
하느님의 친구
성지 중에서 가장 오래 된 도시 가운데 하나인 고대 헤브론에는 고대 회교 사원 안에 있는 사라의 무덤 곁에 성조의 무덤이 보존돼 있다. 이 도시는 아랍어로 “엘칼릴”(el-Khalil), 즉 “친구”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 아브라함을 부르심
아브라함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연대기적 역사가 아니다. 그의 고향이 어디며, 그가 몇 세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의 아내가 누구며, 그가 몇 세에 약속의 아들을 얻었던가 하는 것은 우리가 그의 삶에서 보고자 하는 신앙의 삶을 알기 위한 기초적인 사실에 불과하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믿음으로 사는 삶을 읽어야 한다. 왜냐면 성경은 그를 언제나 ‘믿음의 조상‘으로 소개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날 때부터 믿음의 조상다운 특별한 자질을 갖추었던가?
그러나 출발이 어찌됐든 아브라함은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 되었다. 그가 이러한 위인이 된 것은 그가 날 때부터 특이해서가 아니라 그의 삶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탁했기 때문이다.
위인됨에 관해서 島山(도산 안창호) : 위인은 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요, 위인될 마음을 품은 자가 되는 것이다.
마태 4,19에서 주님은 말씀하셨다 :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여기서 “내가…만들겠다“고 말씀하신 것에 주의하라. 삶의 주도권은 주님에게 있다. 내가 내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의 삶이다. 아브라함의 경우 이것은 너무나 분명하게 표출되었다.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는 복이 될 것이다.(창세 12,1-3)
아브라함은 그의 삶을 만들어 가시는 이가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하느님만이 그를 통해서 ‘무엇‘이 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었다. 그의 삶에 대한 하느님의 주도권을 받아들인데서 그의 생애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꽃피기 시작한 것이다. 하느님은 언제나 아브라함의 뒤가 아니라 앞에 계셨다. 그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한 후원자가 아니라 그에게 절대적인 주권을 행사하시는 분으로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느님을 만났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의 하느님은 앞에 있는가? 뒤에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뒤따라 가는 사람이다. 사도 바울로의 고백처럼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필리 1,20)이 인생 목표가 되어야 하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갈라 2,20)
또 한 가지, “내가 너희를…만들겠다“는 주님의 약속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나를 따라오너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내가 성실히 응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믿음의 삶은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에 온 몸으로 따라 나서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이에 대한 좋은 예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가리켜 “믿음이 좋다“고 말할 때, 무엇을 보고 그리 말하는가? 미사에 성실히 참여하며, 교회 봉사에 헌신적이며, 기도와 성경공부에 열심이며, 교인의 의무를 행함에 있어서 철저하다 할 지라도, 그의 삶을 자신의 주도로 살아 나가며, 하느님의 부르심 대신 주위의 환경에 지배되어 살아나간다면 그러한 그의 삶을 가리켜 믿음의 일생이라 말하기는 곤란하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서 믿음으로 반응하며 따라 갔다. 그러나 그는 모든 순간마다 믿음으로 일관되게 반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라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땅으로 왔지만, 그 곳에 기근이 닥치자 하느님의 뜻을 구하지도 않고 그 자신의 결정으로 이집트로 도피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이집트에서 최악의 거짓말을 했다. 자기 아내 사라이를 누이라고 속여 이집트왕에게 넘겨 주고 자기 생명을 유지한 것이다. 이처럼 부끄러운 기록이 창세 12장에 실려 있다. 약속의 아들이 생각처럼 빨리 주어지지 않자 그는 사라이의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대신하고자 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어야 했던가?
그러나…. 그때마다 하느님이 그의 삶에 개입하셨다. 하느님이 그의 실수를 교정해 주셨다. 이같은 허다한 실수를 통해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자기가 믿는 하느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점차 깨달아 갔다.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은 점점 성숙해져 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창세 22장의 모리야산에서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드리는 그 절정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느님께서 그의 삶에 개입하셨고, 끝내는 그를 변화시켜 이토록 위대한 신앙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느님이 오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부르셨다. 그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멋진 인물로 변화시켜 주셨듯이 우리도 변화시켜 성도라는 이름에 걸맞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지 않겠는가?
아브라함은 번제물에 관해 묻는 이사악에게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자(22,7),
아브라함이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하고 대답하였다.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야훼 이레’라 하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마련된다.’고들 한다”(창세 22,14).
창세 22장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클라이맥스다. 창세 12장에서 믿음으로 시작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라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땅으로 오기는 했다. 그러나 그 땅에 기근이 닥치자 그는 이집트로 도피하고 말았다. 이것은 분명히 믿음의 행위는 아니었다. 더 나쁜 것은 이집트로 가서 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자기 아내 사라이를 누이라고 속여 이집트왕에게 바쳤다. 얼마나 부끄러운 짓이었던가? 그러나 창세 22장에서 그는 나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갖다 바치는 놀라운 믿음을 보여 준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아들 이사악을 어찌 그리 내어 놓을 수 있었을까? 도대체 그가 무엇을 믿었길래 그 아들 이사악의 죽음을 예상하고도 번제물로 바칠 수 있었던가?(로마 4,17; 히브 11,17-19)
그는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하느님을 믿었다. 그는 자신의 죽은 몸을 살려서 100세에 아들을 얻게 하신 ‘전능하신 하느님‘(엘 샤다이–창세 17,1)께서 번제로 바칠 아들을 능히 살리실 수 있음을 믿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시작은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는 자신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시며, 땅을 주시며,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복을 주실 하느님을 믿었다(창세 12,1-3).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 15,6). 믿음으로 사는 이들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갈라 3,6-9)
결국 모리야산에서 아브라함이 믿은 하느님은 부활의 하느님이다. 그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독자 이사악을 기꺼이 죽음의 번제물로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약 성서에는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란 표현이 아주 빈번히 나온다. 혈족으로서 또는 할례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모든 히브리인들의 영광이었다. 예수는 이러한 국민적 감정에 동의하나 그 의미를 약간은 바꾸어 이렇게 표현한다. “만일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대로 할 것이다”(요한 8,39). 바오로는 이 새로운 의미를 더욱더 분명히 설명한다. 사실 아브라함은 할례나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할례를 앞서는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친구가 되었다. “그는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음으로써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로마 4,11).
* Leader로서의 형성과정
부르심 – 하느님의 부르심
정착 –하느님과 아브라함
아브라함과 가족
성숙
마침 – 자신은 어떤 영향의 Leader – 후손에게 미친 영향
우리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